수입차가 처음 수입되기 시작한 때는 1987년 1월, 정부는 2.0L이상 대형차와 1.0L 이하 소형차시장을 우선적으로 개방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전차종에 대한 배기량 규제를 풀어 완전히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분위기는 이제 갓 성장기로 선 국내자동차산업의 위축과 외화낭비, 과소비와 사치풍조로 인한 계층간 위화감 조성 등의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이 절대적이었다. 수입차 판매는 미미했다. 개방 첫해 수입차 판매를 시작한 업체는 한성자동차(벤츠), 효성물산(아우디/폭스바겐), 한진(볼보), 코오롱상사(BMW) 등이었고 판매실적은 벤츠가 10대가 전부였다.
88년 들어 동부(푸조), 두산(사브), 기아(포드), 금호(피아트), 쌍용(르노) 등이 수입차 판매에 가세하면서 판매량이 263대로 늘었다. 그리고 89년에 1천 293대, 90년 2천 325대로 시장 규모가 커졌다. 또한 50%였던 관세가 단계적으로 인하 90년에는 20%까지 내려갔다. 전체 판매수치는 사실 얼마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언론은 판매 증가율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문제로까지 번졌다. 즉 외제 선호 또는 과소비라는 비난이 거세어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수입차 업계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늘어난 판매수치는 대부분 기아 세이블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9년 10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세이블은 기아가 주문자 생산방식(OEM)으로 수입한 모델로 석달 동안 493대를 판매했고 90년에는 1천 579대로 다른 수입차 전체 판매량의 절반 가까이에 다다랐다. 국내 메이커가 수입차를 들여다 판다는 비난보다도 수입차판매가 크게 늘었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이후 수입차 오너에 대한 세무조사 등 으로 찬바람이 몰아친 수입차시장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판매량은 91년 1천 736대, 92년 1천 817대, 93년 1천 987대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쌍용이 르노의 판매계약을 중단하고 두산이 사브의 판매권을 신한자동차에게 넘겨주는 등 일부 수입사는 영업을 중단 할 수 밖에 없었다.
수입업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 병행 수입업자(Gray Importer)들이었다. 병행수입업체란 메이커와 직접 독점수입 계약을 맺지 않은 회사가 타국의 딜러에게서 차를 수입, 판매하는 수입사를 말한다. 이들은 정규업체가 수입하지 않는 스포츠카나 밴 등을 판매해 차종다양화에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애프터 서비스, 품질보증 등 사후 보장문제 등에서 정규업체에 밀려 제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한편 94년 이후 불어닥친 세계화, 개방화의 바람은 수입차 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산차 판매가 100만대를 넘어서면서 국내 자동차시장에 대한 통상압력이 더욱 거세지게 된다. 결국 95년 1월 관세를 8%로 인하시키는 한편 7천만원 초과 승용차의 취득세를 15%에서 2%로 대폭 낮추었다. 그해 9월에는 한미자동차 협상타결로 특소세와 자동차세까지 인하되기에 이른다. 더불어 판매대리점, 광고시간 등의 규제도 폐지되었다.
이처럼 숨통을 튼 수입차 업계는 본격적인 판촉활동으로 판매가 크게 늘어나게 된다. 93년까지 2천대 미만에 머물렀던 수입차 판매는 94년 3천 865대, 95년 6천 921대에 이어 96년에는 1만 315대를 팔아 사상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IMF여파로 수입차는 97년 8천 136대에서 98년 2천 75대로 판매가 크게 줄어들어 심각한 위기에 부딪치게 된다. 99년에는 2천 401대로 전년보다 15.7% 늘어났지만 국내 승용차 판매에 대비한 수입차의 시장 점유율은 0.3%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편 국내 수입차 시장 규모가 커짐에 따라 외국 메이커가 직접 진출하기에 이른다. 95년 BMW를 시작으로 크라이슬러, 포드가 국내법인을 설립했고 GM도 99년부터 본격 판매활동을 시작했다. 볼보와 사브가 승용차 직판체제를 갖추었고 2000년 도요타가 국내법인을 설립했다. 수입차는 그동한 호화사치품이라는 곱지않은 시각속에서 고전해왔지만 나름대로 성과도 적지않았다. 우선 수입차는 국내 자동차시장의 성격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쳤다. 80년대말까지 우리나라는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이 가속화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자시장이었다. 메이커의 입장에서는 '없어서 못판다'는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 메이커들은 신기술 도입보다는 잘 팔리는 모델 생산에 주력해 왔다.
수입차가 영업활동을 펼치면서 보여준 것은 수요자시장에서의 고객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국내메이커가 단순히 차를 판매하는 데 목적을 둔 반면 수입사는 각종 문화, 스포츠행사를 지원하기도 하고, 자체 행사의 다양화를 통한 고객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친밀한 마케팅활동을 폈다. 또한 수입사의 정비공장은 국내 메이커보다 규모는 작지만 판매대수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커 적극적인 애프터서비스가 이루어진 것도 큰 차이점이다. 이에 따라 고객들의 인식이 바뀌는 한편 메이커에게도 수요자시장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수입차는 폐쇄된 시장에서 안주해온 국산차에 비해 성능은 물론 안전도, 편의장비 등에서 훨씬 높은 차원을 보여주었다. 이런 수입차를 대하면서 소비자들은 자연스레 차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가 있었고 국산차에 대한 요구를 더욱 크게 해 국내 메이커들이 기술개발에 자극제가 되었다.
실제 수입차가 선보이기 전까지 ABS나 에어백 등 혁신적인 안전장비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시 국산차의 안전 메커니즘이란 충격흡수식 조향장치와 안전벨트 그리고 충격흡수식 범퍼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 ABS와 에어백은 경차에까지 옵션으로 달릴만큼 변화했다. 물론 이런 변화는 국내 내수시장에서의 경쟁이 심화되고 수출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를 앞당긴 데는 분명 수입차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수입차의 역기능보다 전반적인 국산차의 품질향상에 끼친 순기능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수입자동차시장은 "2000수입자동차모터쇼"를 전기로 발전의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특히 일본의 토요타자동차가 LEXUS브랜드를 가지고 국내시장에 진출하고, 효성에 이어 극동유화의 고진모터임포트가 Audi와 Volkswagen의 국내 공식임포터로 출범하는 2000년은 수입차시장에 다시 한국시장에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된다.
2000년과 2001년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감된 수입차 시장이 다시 도약하는 한해였다. 판매증가율도 100%에 이르렀으며, 판매모델 및 메이커도 증가되었다. 2002년에 들어서는 Mercedes-Benz가 국내에 현지법인을 출범시켰으며, 1998년 동부에서 철수한 Peugeot도 한불모터스가 공식 임포터로 다시 한국시장에 진출하는등 시장의 변화가 가속화 되고 있으며, 판매대수도 비약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수입차에 대한 판매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그 동안 주춤했던 수입차 브랜드의 현지 진출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2년에 들어 Mercedes-Benz가 국내에 현지법인을 출범시켰고 1998년까지 동부를 통해 수입, 판매되다가 철수한 Peugeot도 한불모터스를 공식 임포터로 한국시장에 재진출한다. 2003년 이후 시장 내 수입차 브랜드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어 Honda와 스포츠카의 대명사인 Ferrari와 Maserati가 국내에 진출한다.
2004년에는 Audi Korea, Nissan Korea 등과 같은 현지 법인설립과 더불어 롤스로이스와 마이바흐 등과 같은 최고급 럭셔리 세단 등도 국내판매가 시작되고 2005년에는 고진모터임포트를 통해 수입판매 되던 Volkswagen이 직접 현지법인 설립을 했고 BMW는 MINI판매를 시작하게 된다.
이로써 IMF 시련기를 거친 수입차 시장은 2001년부터 판매에 있어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고 다양한 브랜드의 국내 시장 진출과 현지법인 설립 등으로 양적, 질적 성장기를 거쳐 시장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한편 2000년 2003년 2차례에 거쳐 성공적인 '수입자동차모터쇼'를 개최한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는 자동차업계 내외의 바램이었던 수입차와 국산차가 함께 참가하는 '2005서울모터쇼'를 공동 개최하게 된다.
출처 : 한국수입자동차협회 http://www.kaida.co.kr/index.jsp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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